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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여민관

훈민정음 경산 칼럼

[칼럼 65] 언문 창제를 반대한 우두머리 최만리에 대한 오해와 진실(3)

관리자 | 조회 75

[칼럼 65] 

 

언문 창제를 반대한 우두머리 최만리에 대한 오해와 진실(3) 

 

 

최만리의 현실적 삶과 역사적 평가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건은 세종 26년 되던 1444년 2월 20일에 일어난다.

 

그날 그는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종3품의 직제학 신석조4품의 직전 김문4품의 응교 정창손5품의 부교리 하위지6품의 부수찬 송처검8품의 저작랑 조근 등 함께 근무하던 아래 관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그해의 간지를 따라서 갑자 상소라고도 불린다.

 

널리 알 듯 지금 한글로 불리는 훈민정음은 세종 25(1443) 12월에 창제되었다그해의 맨 마지막 실록 기사는 이달에 주상이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고 밝혔다매우 중대한 사건인 문자의 창제에 대해서 정확한 날짜도 밝히지 않은 짧고 소략하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비밀스럽게 추진된 작업이었다는 방증으로 평가된다.

 

세종이 추진한 첫 훈민정음 관련 사업은 이듬해 2월 16원나라 웅충(熊忠)이 엮은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라는 운서를 언문으로 번역하는 것이었다이런 조처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훈민정음의 이름이 웅변하듯훈민정음 창제의 일차적 목표가 현실과 맞지 않는 당시의 한자음을 바로잡는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세종은 그 작업을 집현전 교리 최항부교리 박팽년부수찬 신숙주이선로이개돈녕부 주부 강희안 등 집현전의 젊은 학사들에게 맡겼다.

 

갑자 상소는 이 지시가 있은 지 나흘 뒤 올라왔다최만리 등은 언문의 제작은 지극히 신묘해 만물을 창조하고 지혜를 운행함이 천고에 뛰어나지만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의심되는 측면이 있어 뒤에 열거하오니 판단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는 부드럽지만날카로운 문장으로 상소를 시작했다.

 

그들이 의심한 부분은 다음의 여섯 가지였다.

 

첫째조선은 조종 때부터 지성스럽게 대국을 섬겨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랐는데이제 언문을 만든 것을 중국에서 알면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 부끄럽다.

 

둘째몽골서하(西夏), 여진일본 등은 각기 글자가 있지만오랑캐니 말할 것이 없다지금 언문을 만든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다.

 

셋째문자 생활은 이두로도 불편하지 않다언문을 사용해 그것으로 출세할 수 있게 되면 고생해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넷째형벌과 옥사를 공평하게 하려는 목적이라지만 그것은 문자가 아니라 옥리(獄吏)의 자질에 달려 있다.

 

다섯째중요한 일을 성급히 추진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동궁이 성학에 마음 쓸 때인데 언문에 신경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즉 첫째와 둘째는 사대에 저촉된다는 우려를 표현한 것이고셋째와 넷째는 현실에서도 필요치 않다는 지적이며다섯째와 여섯째는 전체적인 상황을 근거로 한 반대 논리를 피력한 것이었다.

 

최만리 등은 언문을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라고 깎아내리면서 지금이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술이나 재주에 지나지 않아 학문을 손상하고 정치에 이로움이 없으니 거듭 생각해도 옳지 않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맞서는 세종의 반응 또한 거칠었다.

 

지금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다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또 너희가 운서(韻書)를 아는가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 개나 있는가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 잡겠는가?”

 

최만리와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이 발언에는 언어학에 관련된 세종의 자부심이 넘친다.

 

세종은 최만리를 비롯해 상소에 참여한 사람들을 의금부에 하옥시켰다가 세자에게 다음날 석방하라는 권한을 위임하는 신의 한 수를 둔다.

 

하루 만에 풀려났지만최만리의 공식적 경력은 이것으로 마감되었다그는 다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인 세종 27(1445) 10월 23일에 세상을 떠난다.

 

결론적으로 최만리는 뛰어난 학자들이 모인 집현전의 수장을 지낸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다그런 지식인도 넘거나 깨닫지 못한 한계 너머를 본 유일한 사람은 위대한 국왕 세종이었다.

 

훈민정음 창제라는 그의 위대한 업적은 580여 년의 긴 시간 동안 수많은 실험과 도전을 겪었지만결국 그가 처음 의도한 방향대로 구현되었다지금 서울시 중구 만리동은 그가 살았던 데서 온 이름이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