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59]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에 숨겨진 이야기 세 번째
관리자 | 조회 77
이순황의 연락을 받고 ‘한남서림’으로 찾아온 김태준을 만난 전형필은 훈민정음의 값을 얼마나 받을 것인지 묻자, 김태준은 쓸 돈을 고려하여 자기 생각으로 너무 과한 금액이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1천 원을 불렀는데 현재의 화폐가치로는 약 3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전형필은 뜻밖에도 “천태산인(김태준의 호) 그런 귀한 보물의 가치는 집 한 채가 아니라 열 채라도 부족하오.”라고 하면서 보자기 두 개를 건네주면서 그중에 천 원이 담긴 보자기를 김태준에게 내밀면서 “이것은 훈민정음의 값이 아니라 이 귀한 책을 소개해 준 천태산인께 드리는 성의로 준비한 사례요.”라고 한 뒤, 이어서 다른 보자기를 건네면서 “이것은 ‘훈민정음’의 값으로 만 원을 담았습니다. 이렇게 값진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하면서 김태준이 제사한 값의 10배나 되는 거금을 건넸다.
소문은 들어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너무나 통이 큰 전형필에게 감탄한 김태준은 즉석에서 “만 원을 책정하여 인편으로 내려보내니 정중히 책을 건네고 책값으로 과분하게 받았으니 다른 책도 몇 권 더 주면 좋겠다.”라는 편지를 써서 이순황을 안동으로 내려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순황을 통해서 꿈에 그리던 훈민정음의 원본을 받아 내용을 확인해 보니 모두 3부 33장으로서 제1부는 훈민정음 본문을 4장 7면에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2면에 면마다 8행 13자씩이나 마지막 면은 3행이고,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으로 3장 6면에 한 자씩 내려 싣고서 그 끝에 ‘정통 11년 9월 상한’이라고 명시하고 있는데 그 해가 바로 세종 28년으로 세종실록 병인년(1446년) 9월 29일 자에 기록된 데로 ‘상세히 해석을 가하여 여러 사람을 깨우치게 하라고 명하셨다.’라는 내용과 일치한 명실상부한 ‘훈민정음해례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일제의 감시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인수했다. 소유주가 1천 원을 불렀으나 전형필은 10배인 1만 원을 지급했다. 기와집 1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책을 소개한 김태준은 따로 수고비 1천 원을 받았다. 이에 따라 해례본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해방되자 이 책의 존재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한글 창제 원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간송 전형필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 중에서 최고의 보물로 여긴 훈민정음해례본은 6.25 전쟁 중에 피난하면서도 품속에 넣고 다녔다고 하기도 하고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잘 때도 베개로 삼아 베고 자며 지켰다고 전한다.
한편 김태준은 1941년부터 옥고를 치르다 1943년 여름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 항일 무력운동의 가능성을 탐색하다 조선의용군이 주둔하던 연안(延安)으로 떠난다. 1945년 4월 연안에 도착한 이후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걸어서 11월 하순 서울에 도착한 김태준은 12월 경성대학 초대 총장으로 선출됐으나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문화부장에 임명됐고 남로당 간부로 지리산 빨치산 유격대들을 대상으로 특수문화 공작을 하다가 전북 남원에서 국군토벌대와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11월, 서울 수색 근처에서 총살되었고, 이용준은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여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 박 재 성